베트남 전적지여행의 체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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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세월이 훌쩍 흘러
아련한 그리움이 있는 땅
내 마음의 그리움을 찾아 떠난다
설레임에 가슴벅찬 베트남 전적지여행
       
 
라이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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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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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20.xxx.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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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9] 라이따이한도 성공할 수 있다 ”
"라이따이한도 성공할 수 있다"
내이름은 라이따이한/ 비지니스맨으로 성공한 쨘 다이 송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저는 베트남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몇 일을 걸어서 밥을 구걸하던 그 때의 쨘 다이 송이 아닙니다. 나는 베트남의 경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2006년,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은 이제 더이상 배고픈 어린 아이가 아니다. 마흔 이쪽 저쪽의 나이에 접어든 그들은 베트남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키드멕스(KIDEMEX)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로 한복에 자수를 놓아 한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쨘 다이 송(Tran Dai Song 35세ㆍ남)도 그런 베트남의 수많은 라이따이한들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 기독공보가 소개할 라이따이한은 베트남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잡은 쨘 다이 송이다.

   
베트남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쨘 다이 송씨가 어머니를 찾아와 옛얘기를 나눴다.
그의 베트남 이름은 융엔 비에트 송(Nguyen Viet Song). 지금은 쨘 다이 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1970년생이니까 해를 넘긴 올해로 서른일곱살.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Hue)에서 직원 3백여 명을 둔 회사를 운영하는 젊은 실업가다. 베트남 후에는 한국의 경주와 같은 곳으로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가 살았던 고성(古城)이 그대로 보존된 관광도시다.

후에에는 호치민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도착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쨘 다이 송, 그의 명함을 내밀었더니 택시 기사가 벌써 그를 알아보고 안내할 정도로 후에에서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호치민에서 만난 그는 일본산 지프를 타고 왔었지만, 후에의 공장에서 만난 그는 또 일본제 검정색 세단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베트남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보여주는 전형은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어머니 융엔 트이 봉(Nguyen Thi Bonㆍ1941년생)는 1970년 다낭의 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남편 송△△씨(1942년 혹은 1943년생으로 추정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살고 있었으며, 같은 미국인 회사의 식품창고를 관리하던 남편은 그 당시에 베트남의 '과부'와 계약동거를 원했었다.

1970년 1월부터 동거에 들어간 그의 부모는 그러나 1972년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의 머리가 좋은 것 같으니 의사를 하도록 공부를 시켜달라"고 당부하고 운영하던 가게와 현금을 두고 갔다. 다낭에 살던 그의 부모는 호치민에서 마지막 만남을 가졌으며, 그당시 찍은 사진은 아직도 그가 간직하고 있다.

남편이 남겨준 가게와 현금은 그러나 1975년 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정부가 재산을 몰수했으며 모자는 공안의 눈을 피해 시골로 도망다니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어머니가 숨겨두었던 얼마간의 금으로 두 모자가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수입없이 학교를 다니고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쨘 다이 송이 사업가로서의 기틀을 닦은 것은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빠빠정'으로 부르는 정주섭씨가 설립한 직업기술학교와 뒤이어 김영관목사가 설립한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부터. 다낭에서 살던 쨘 다이 송은 호치민에 한국인이 기술학교를 세워 라이따이한을 돕고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상경했다. '빠빠'는 아빠를 의미하며, 적지 않은 라이따이한들이 정주섭씨를 '빠빠'로 부르고 있다.

쨘 다이 송을 기억하는 정주섭씨는 "자전거도 하나 없이 걸어서 다낭에서 호치민까지 왔었어요. 완전히 거지 모습을 했었지요".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 도움을 청하는 쨘 다이 송에게 정주섭씨는 다른 라이따이한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살 수 있도록 했고 한글과 타자를 배울 수 있게 했다. 쨘 다이 송은 뒤이어 김영관목사가 설립한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도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컴퓨터를 배웠고 베트남의 한 젊은이로 거듭 태어났다.

'빠빠정'에게서 밥을 얻어 먹고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그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고 휴메인직업기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관광회사에 취직해 통역가이드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라이따이한'인 쨘 다이 송은 한국인 관광객으로부터 더 많은 '팁'을 받을 수 있었다. 관광 가이드로 돈을 번 그는 부동산업과 해산물 수출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고, 1999년 한국인 사업가를 만나 한복에 자수를 놓아 다시 한국으로 수출하는 일을 하면서 그의 사업은 급속도로 확장됐다.

그의 사업은 비전문가의 눈에 보기에도 '땅집고 헤엄치기' 수준이다. 그의 공장은 과거 천주교 성당이었던 건물로 후에 성(省)정부로부터 50년간 임대받은 것이며, 월 임대료는 무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저렴하다. 베트남의 후에는 관광도시로 주위에 이렇다할 공단이 없기 때문에 유휴인력이 풍부한 것도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한 한복 자수라는 사업의 특성에 꼭 들어맞는다. 사업상 성공하기 위한 기반이 모두 갖춰졌다는 얘기다.

한눈에도 고급스럽다고 느끼는 그의 집은 대문에서부터 심상치가 않다. 출입문 머리에는 우리말로 '사랑해' '행복집'이라고 새긴 설치물이 하나 달려 있다. 아주 자랑스러운듯 이 설치물을 소개하는 그는 "이웃들은 내가 한국사람인줄 알아요"한다. 또 최근에 재혼한 그는 딸을 하나 얻었는데 이름을 송난히(Tran Song Ran Hi)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

"나는 아버지가 세 명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나에게 밥을 준 '빠빠정' 그리고 공부를 가르켜준 김영관목사님이 모두 저의 아버지입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세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한 쨘 다이 송은 기자가 후에를 떠나기전에 이렇게 말했다. 항상 노력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운 사람 도우며 살겁니다. 내가 먼저 많이 어려웠었고 그 어렵던 때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베트남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어서 사회에 공헌하며 살고 싶습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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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53
ㆍ추천: 0  ㆍ조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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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8] 머리좋고 공부잘하던 학생 ”
"머리좋고 공부잘하던 학생"
내이름은 라이따이한/ 쨘다이송을 말하는 사람들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송주인.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쨘 다이 송씨에게 있는 한국 이름이다. 그는 1994년 휴메인직업기술학교의 주선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 라이따이한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온 그는 대전 엑스포와 롯데월드 워커힐 등의 관광코스를 돌며 한국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얻은 이름이 송주인이다.

   
베트남의 젊은 실업가로 성공한 라이따이한 쨘 다이 송씨는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도 머리좋고 공부잘하기로 이름난 학생이었다. 이 학교의 공동이사장인 김영관목사는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아주 똑똑했던 친구"로 평가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그의 영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 목사는 쨘 다이 송이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두고 '싫은 소리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앙생활을 하고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그래서 이혼하지 말고 가정을 잘 돌볼 것을 염려하는 '잔소리'를 많이 했던 까닭이라는 것이다.

쨘 다이 송이 '빠빠'로 부르는 정주섭씨와 정씨를 도와 함께 일한 강희조씨도 그를 기억했다. 정주섭씨는 아직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기 전인 1990년도에 베트남에 들어갔다. 정주섭씨는 호치민에서 우연히 라이따이한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베트남 정부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구호단체와 협력해 직업기술학교를 열었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 1년반만에 문을 닫았지만 많은 현지에서 만난 대부분의 라이따이한들은 빠빠정(정주섭)과 이 학교를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또 많은 수의 라이따이한들은 이 직업기술학교와 함께 김영관목사가 설립한 휴메인직업기술학교를 통해 한국어와 영어 타자와 컴퓨터를 익혔고, 그것을 기반으로 베트남의 훌륭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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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50
ㆍ추천: 0  ㆍ조회: 152    
IP: 220.xxx.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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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7] 아버지를 위한 변명 ”
아버지를 위한 변명
[내이름은 라이따이恨] "어쩌지 못한 유혹"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한국에 가정을 두고 해외에 나간 아버지가 현지에서 또다른 가정을 꾸렸다면, 더구나 그 현지의 가정을 '나몰라라' 버려두고 한국으로 돌아와버렸다면 비난을 면키는 어려운 일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떤 변명도 통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을 생산했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겪었던 엄연한 현실이다.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면죄부를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이 전하는 라이따이한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지면에 옮기는 것은 '현실'에 한발짝 더 접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당시 베트남에 나와있는 미국인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업할 경우 한국인이 받는 월급은 약 1천달러 정도였다. 또한 1년에 두차례 주어지는 휴가비가 한 번에 약 1천달러 정도 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1천달러면 한국에서는 도시 변두리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달러'의 위력이란 대단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인 회사에 취업해 달러를 벌어들인 한국인들은 대략 30~40대로 이들의 대부분은 휴가비도 송금할 정도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육체적으로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여성들과 동거하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유혹이었다는 것이 베트남 현지인 경험자들의 전언이다.

베트남에서 만난 라이따이한들이 가장 가슴아파하는 부분은 전쟁이 끝난 뒤 정부의 뒤처리 부분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외모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미국인 2세들을 모두 본국으로 데려간 반면 한국은 자국민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에도 힘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당연히 2세들에게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이 문제를 다시 꺼내들고 "국가가 나서라"고 주장한들 별무소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과 베트남 두 정부간의 외교문제일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 나선다 하더라도 이미 기성세대로 편입해 베트남 사람으로 살아가는 라이따이한들을 발굴해서 도움을 주는 일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개인사생활에 관한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민간차원의 접근은 더더욱 한계가 뚜렷하다.

따라서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을 도와온 관계자들은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의 문제는 더 이상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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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47
ㆍ추천: 0  ㆍ조회: 340    
IP: 220.xxx.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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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6] 신학의 열정 품고 암과 싸우는 '김수산' ”
베트남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내이름은라이따이恨 '신학의 열정' 품고 암과 싸우는 김수산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최소 1천 명에서 많게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되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은 이제 베트남의 경제와 문화의 중추를 담당하는 세대다. 그들은 30대 중반에서 40대를 넘기면서 어둡고 힘들었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베트남의 밝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의 베트남 사람으로 안착하고 있다.

   
김수산씨와 그녀의 어머니가 출석하는 교회를 찾았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김수산. 오늘 기독공보가 소개하려는 이 여인도 베트남의 한 젊은이로 살아가는 라이따이한이다. 리 투이 티엔(Ly Thuy Tien)은 그녀의 베트남 이름이며, 1972년생이니까 올해로 서른다섯이다.

1934년생인 그녀의 아버지 김△△씨는 서른두살이던 1966년 달러벌이를 위해 베트남으로 왔다. 수산씨의 아버지는 다낭에 자리한 미국회사 '지에스오 유에스(GSO US)'에 엔지니어로 왔고 같은 회사의 비서로 일하던 열여덟살 난 그녀의 어머니 리 투이 캄(Ly Thui Cam)씨와 만났다.

수산씨의 아버지는 한국에 가정이 있었지만 베트남에서 어머니와 1969년 결혼식을 올렸고 3년간 살면서 수산씨와 여동생을 낳았다.

많은 라이따이한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아버지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71년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수산씨의 아버지는 "다시 돌아올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고, 많은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들과 달리 그는 1974년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아내와 딸들을 만났다.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초청장을 가져왔고 1주일간 물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아내와 두 딸들이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올 것을 믿고 돌아갔지만 베트남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어머니는 비자와 여권을 만들기 어려워 다낭에서 사이공(현재 호치민)으로 동분서주했지만 끝내 서류를 완비하지 못했고 그사이 전쟁이 끝나버렸다.

   
김수산씨의 어머니가 간직해온 아버지와 관련된 서류들.
아버지가 다녀간 이듬해인 1975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베트남은 공산국가가 되어버렸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적국'이 되었고 적국의 국민과 동거했던 사실은 드러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준비했던 모든 서류와 자료들은 적군과 내통한 증빙자료로 돌변했으며 그 일이 발각되어 감옥으로 가는 사람도 있어 어머니는 모든 서류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조국이 통일됐다는 것, 준비했던 서류가 불탔다는 것은 그녀의 가족들이 아버지 곁으로 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때부터 수산씨의 고생은 시작됐다. 어머니와 두 딸은 고향 다낭을 떠나와 호치민에서 남모르게 살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끼만 먹을 수 있었어요. 엄마는 제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주기를 바랬지만 저는 공부가 하고 싶었거든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비록 밥은 굶고 다녔지만 12학년까지 마쳤어요".

수산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신앙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그녀가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녀가 스무살이던 1992년부터다. 한인교회가 아니라 베트남인 교회인 도힌탄(To Hien Thanh)교회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후에 그녀는 이 교회에서 한국인 사역자를 만나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오늘까지도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김수산씨 집에 걸려있는 시편23편1절 말씀의 액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인(정주섭씨)이 주도해 설립된 직업기술학교(이 학교는 1992년을 즈음해 없어졌다)와 김영관목사가 설립한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두 곳에서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타자를 배운 수산씨는 한국인 회사에 한국어 통역으로 취직을 했고, 다른 베트남 사람들보다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수산씨는 지금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 지난해 4월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한국인 사역자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가서 수술을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에 와서 의료사역을 했던 팀과 연결돼 한국으로 초청절차를 밟고 있다. 그녀는 지금 암과 싸우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둔 상태다.

그녀는 스물여섯살 되던 해에 도힌탄교회에서 한국인 사역자로부터 신학의 권유를 받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수산씨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선택했고, 병마와 싸우며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지금은 신학공부가 하고 싶다.

"너무 많이 아파서 성경을 보면서 고통을 참고 있어요. 수술을 받아서 병마를 이겨내고 한국에서든 베트남에서든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요". 작은 체구 작은 얼굴의 그녀가 나지막히 소망을 이야기했다.

수산씨의 어머니는 2년전부터 집에서 가까운 통 타이 호이(Thong Tay Hoi)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녀는 "처음에 딸이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을 때는 별로 생각이 없었지만 남편(김△△씨)이 교회에 다니는 걸 알았고, 나도 '가족'이니까 교회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수산씨의 아버지 김△△씨는 지난 1994년 베트남으로 아내와 두 딸을 찾아왔다. 다낭의 옛집을 찾아와 수소문 끝에 수산씨 모녀를 만났고 그는 다시 수산씨의 한국행을 추진했다.

수산씨와 마찬가지로 1994년 당시 암과 투병중이던 김△△씨는 딸에게 마지막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보낸다. 아버지가 시간이 많이 없다". 하지만 수산씨의 오빠들(김△△씨의 한국인 자녀들)은 수산씨가 한국에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수산씨의 두 번째 한국행은 아버지가 1997년 사망하면서 또다시 물거품이 됐다.

그녀는 암치료를 위해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다. 베트남의 사역자와 국내 의료진이 협력해 추진되고 있으며, 그녀가 한국에 올 날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좋은 한국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어 한국에서 치료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내가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에 많이 걱정됩니다. 수산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수산씨의 세 번째 한국행을 앞두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요청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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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39
ㆍ추천: 0  ㆍ조회: 166    
IP: 220.xxx.155
http://namcafe.cafe24.com/cafe/?namboard.483.22
“ [시리즈-5] 현지 라이따이한의 토로 ”
"한국교회가 도울 일 많아요"
내이름은라이따한/ 현지 라이따이한의 토로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고 몇몇 라이따이한들은 말한다. '내이름은 라이따이恨' 취재를 위해 찾은 베트남 현지의 일부 라이따이한은 "한국에 근로자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근로자에 라이따이한이 포함되도록 정책적인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베트남 한 농촌마을의 모습.
호치민을 떠나 나쨩에서 투이호아 퀴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중남부 해안지방 -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주둔지다 - 을 2박3일 동안 다니며 라이따이한을 찾았다. 여기서 만났던 대부분의 라이따이한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입을 맞춘듯 한결같이 '아버지를 보고싶다'고 말했다. 여성 라이따이한 중에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몸을 파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현지인의 설명이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 특별히 라이따이한만이 생활고를 겪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 2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주장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를 찾는 문제는 사생활침해라는 넘기 힘든 벽이 있지만 경제적 자립 문제는 다르게 생각됐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호치민 휴메인직업기술학교 이사장 김영관목사는 "라이따이한의 교육문제는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 모두 끝냈다"면서 "이제 30대 중후반이 된 라이따이한들이 어렵게 사는 이들도 있겠지만 자신이 라이따이한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얼마간의 생활비를 후원받기 위해 아픈 개인사를 들추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주 호치민 김지영총영사도 김 목사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라이따이한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노동인력을 사용하는 기업체 입장에서 '특별한 관리'가 어려울 뿐더러 20대 초반의 젊은 노동력을 선호하기 때문에 30대 중후반인 라이따이한은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도움받기를 원하는 라이따이한을 찾아 한국 교회가 개별적으로 돕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한아선교봉사회 베트남선교협회 등 한국 교회에는 베트남을 돕는 선교ㆍ봉사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가 파송한 많은 사역자들이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어 이들과 협력할 수 있다. 또한 새문안교회(이수영목사)와 같이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몇 안되는 라이따이한들의 생활비를 후원하고 외롭지 않도록 돌보는 일도 한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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