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적지여행의 체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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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세월이 훌쩍 흘러
아련한 그리움이 있는 땅
내 마음의 그리움을 찾아 떠난다
설레임에 가슴벅찬 베트남 전적지여행
       
 
라이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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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현            
작성일 2007-04-04 (수) 13:14
ㆍ추천: 0  ㆍ조회: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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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아버지! 한번만 보고파요 ”


안케패스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빈케마을의 교회에 들렀습니다.
시골마을의 교회였지만 12월25일 크리스마스날이라 마을사람들이 북적 대었습니다.
이 마을에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모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왼쪽은 "랑티 덕"(55세) 여사이고, 그옆이 딸인 최수진(35세) 양이었습니다.



최수진 양은 지금 빈케마을에서 살고 있으며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두고 있으며
벽돌공장을 하는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단지 그녀의 소원은 아버지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인사시키고 싶다는 그런 소망 말이지요.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생각은 아니라며
단지 한번 만나만 보면 좋겠다는 순박한 소원이랍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맹호기갑연대 1대대 영내에 있는 교회의 군목이었으며 성은 "최"
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미스"덕"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딸을 낳고
"수진"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월남패망후 연락이 끊겼답니다. 지금은 그곳도 상당히
성숙한 사회로 개방되어 이런사연을 마음놓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연락처를 메모해 달라고 했더니 내 수첩에 이렇게 적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소박한 소망을 뿌리칠 수 없어 조용히 찾아 볼려고 보훈처 등록명단에 찾아 보았으나
등록된 명단에서는 못 찾았습니다. 맹호기갑 "최" 군목께서 이 사연을 보시고
그 당시 빈케마을을 방문하시게 된다면 반가운 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이렇게 올립니다.



이웃에 또 다른 한명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똘망똘망한 딸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녀의 사연은 깊게 물어보지 못했는데, 아래 메모장에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참 착하게 생긴 한국의 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밝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연을 접하고보니 서로 연락이라도 하면서 사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휴대폰 011-217-9370(최진현)으로
연락 주시면 그들의 최근 소식과 사는곳을 수소문 해 드리겠습니다.

 


220.239.40.180 백 마: 여기 찿는분 죽기전에 소원 풀어 드리길 바랍니다. 혈육의 정이 얼마나 그리우면 한번만이라도.... 하겠습니까? 혹시 일시적인 실수였더라도 혈육인데 천륜은 어기지 말길 부탁합니다. -[01/03-18:21]-
210.101.2.176 정해영: 월남어도 영어와 비슷한가요?마이드레스...찾는사람이름은 권오신(?)글씨가 영어와 비슷하네요?1971년 ..빈케..정말 한 많은 베트남땅입니다.선배전우님들 청춘의 가슴에 못을 박을듯도 합니다 -[01/03-19:40]-
210.101.2.176 정해영: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줍잖은 이념이 자손대대로 구렁텅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그들이 원망스럽고 (지금의사회주의가 좋은지모르지만) 우리조국에도 원망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01/03-19:42]-
203.162.3.156 이남원: 최수진양 아버지는 맹호기갑연대 군목이신 최영 당시대위였습니다
그분은 소령으로 예편하셨습니다

목사이신 아버님이 자신의핏줄을 왜 지금껏 모르척하고 있을가요?
베트남과 수교된후로 한국에 어느 목사님을 보내서 최영씨는 93년에 죽었다고 편지를 보낸적도 있습니다

미국은 수많은 베트남미국 2세들을 교육시켜서 미국으로 대려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라이따이한 2세들은 지금도 교육도 제대로 받지못하고 고생하고 살고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정부에서는 관심을 갖고 라이따이한 2세들을 산업연수생이나 외국취업
근로자로 우선순위로 초청해서 아버지 나라인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은방법같은데............. 전우님들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01/04-00:36]-
222.238.240.82 홍 진흠: 글씨들도 모두 이쁘게 쓰는군요. 마음씨도 착하리라 여깁니다. 꼭 만나십시오. 그게 천륜입니다. -[01/04-01:32]-
211.44.127.40 황진순: 어린애들이 눈망울이 똘망 한것이 마음 아프게 하네요..천륜인데... 지금의 현실에서 받아줄수 없는 입장은 이해하나 서신이나 한번쯥은 만나 보는것이 도리인것 같네요..집사람도 농담으로 당신혹시 월남에 애 두고 오질 않았나 하더만요..안타까운 사연 입니다..사병들은 이러한 사연이 별로 없고 아마 장교나 군속분들이 사연이 있을것 같네요.. -[01/04-08:47]-
211.44.127.40 황진순: 이남원 전우님 말씀에 공감 합니다..한데 그자녀들이 이젠 중년이 될 나이니...라이 따이한의 자녀들을 혹 산업 연수생으로 오는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01/04-09:24]-
210.108.20.205 최현득: 목사님이 이런행동을 하다니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저는 군인은 절대로 이런일을 할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365일 외출 한번 못하고 귀국을 한 병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급수차를 타고 경계병으로 나가는게 유일한 외출이었습니다 그것도 순번을 정하여 놓고 말입니다 파월 1진들이 불쌍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 화가 납니다 잘먹고 잘사시겠지요 목사님 !! -[01/04-09:36]-
222.113.76.101 최덕종: 최현득님 말씀에 공감 합니다. 급수차 경계 차례가 되면 왜그리 좋았던지, 그것도 포반에 있는 사람은 차례가 안오고 경계반에서 돌아 가니 저는 딱 한번 나간적이 있지요. 그리고 최진현님 꼭 기록영화나 연재소설보는 기분으로 하루하루가 기다려 짐니다. 또 무슨 이야기가 올라오는지 궁금하거든요. 기대할께요. -[01/04-09:43]-
210.116.136.103 서건작: 남의 일 같지 않은 가슴 찡한 드라마 같은 현실이 안타깝네요. 그 목사님의 사정도 모르는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자기가 출생후 이름까지 지어줬다면서
아무리 급하게 철수를 했다지만 일반 사병도 아니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할 군목이 이럴수가 있나 싶어 대신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사실 말단 사병들이나 전투병들은 '꽁가이' 손 한번 못 잡아 보고 귀국하는게 다반인데...! 사진(사연) 잘 봤습니다. -[01/04-11:56]-
152.99.32.24 bat29: 군목이라 하드라도 젊은 시절의 실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수교 후 그들의 소식을 알고도 끝내 모른척해 버리는 그의 행위는 만인의 지탄을 받을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최영, 나쁜 놈! -[01/04-12:03]-
203.249.39.161 한호성: 격전지 탐방에서 가장큰 성과 베스트 (1) 로뽑겠습니다. 최영이란분이 어떤 기막힌 사연이 있다면 모르지만 알고도피하는 "혹" 자신의 명예나 신상에 피해 될까봐 그렇다면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욕하고 국가의 누가. 나서리라는 기대도 하지맙시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습니다. 우리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우선할수있는일은 일반사람들에게 홍보하고 또 다행스럽게도 그곳을 찿아가시는 전우님들 물질적 도움이 않되더라도 라면 한박스라도 들고가서 그들에게 관심만 가져줘도 큰자긍심을 느낄 겁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01/04-13:46]-
최진현: 같이간 전우들이 무슨 선물이라도 가져가야 하는데 마침 辛라면 한박스가 있어서 그대로 주고 왔습니다. 그들은 신기해서 끓이는 방법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다음 가시는 전우님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선물을 좀 마련해서 가시면 좋겠습니다. -[01/04-14:08]-
203.247.69.117 이상수: 안타깝군요. 최군목께서 살고 계셨다면 좋았었을텐데..... -[01/04-17:36]-
203.162.3.156 이남원: 최영 목사님은 현재 살아 계십니다
작년까지만해도 성북지구 원호처에 등록되어 있었고 어느 목사님을 보내서 죽은것으로 생각하라고 영문편지을 보냈습니다(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제가 여려번 연락을 취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고 그뒤로 원호처 참전자명단에서도 없어진것 같습니다 -[01/04-23:45]-
218.239.135.34 베트벳 독자: 사람은 죄를 지으면 숨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자신도 그렇습니다. 창피하고 위신이 떨어지니까 말입니다.
다윗도 자기의 신하였던 우리아의 처 밧세바를 데려다가 간음했습니다.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쟁터에 나가있던 우리아를 급히 데려다가 집에가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자 그를 전쟁터에 다시 보내어 최전선에서 죽게 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자 그제서야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다윗의 집은 풍파를 겪게 됩니다. 큰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동생 다말을 강간하자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쳐 죽이고, 또 압살롬이 왕이 되려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한 후 아버지다윗을 죽이려고 해서 다윗은 쫓겨다녔습니다.
사람마다 실수가 있으니 이제라도 하나님과 모녀에게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있습니다. -[01/05-08:12]-
220.239.40.180 백 마: 최근에 이곳 게시판에 최 영 이라고 글 쓰신분이 있었는데 글이 사라져 버렸네요. -[01/05-19:47]-
최남열: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그죄를 뉘우치곤 하지요. 그러나 최영이라는분은 경우가 좀 심하신것 같슴니다. 저도 백마 30연대 전투지원중대 4.2인치 박격포대, 캄란만 앞 남방섬에서 근무했슴니다만 전투병과들은 외춮해 본다는것은 정말 힘든일이엇지요. 이미 35,6년전의 일이고 우리의 청춘을 불태웠던 땅입니다만 우리 전우들에게는 잊을려야 잊을수없는 땅이지요. 저는 무슨 인연인지 이땅에 와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슴니다만 1주전에도 장애자 수용시설에 세탁기 1대를 설치해 드리고 왔고 틈이 나는대로 그런일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청춘을 불살랐고 우리 전우들의 영혼이 스며있는 이땅에 이들의 고통을 나눈다는것은 또한 뜻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베트남을 방문하시는 전우님들 우리의 청춘이 묻혀있는 주둔지도 방문하시고 이런뜻을 나눌수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요. -[11/29-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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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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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mcafe.cafe24.com/cafe/?namboard.491.22
“ [시리즈-完] 특별기획을 마치면서... ”
"우리는 베트남 경제의 주역"
내이름은 라이따이한/ 특별기획을 마치면서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창간60주년을 맞아 본보는 '내이름은 라이따이恨'을 기획하고 베트남 현지 취재를 통해 2006년도 현 시점에서 라이따이한의 문제를 심도있게 접근하고 조명했다. 우리는 라이따이한을 '라이따이恨'으로 규정짓고 그들이 간직하고 살아온 설움의 세월을 조명하는 한편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직간접적 도움을 준 이들을 찾아 2006년 오늘의 시점에서 라이따이한을 어떻게 보고 접근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라이따이한의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의 건실한 생활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한 때 '라이따이한'임을 내세워 한국인들의 동정을 사기도 했고, 한국을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했으며, 지금도 일부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베트남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이미 성장했으며 싸구려 동정심에 의존할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라이따이한을 동포의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온 한국 교회가 '이제 할 일을 다했다'고 손을 놓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여전히 베트남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도 크리스찬들은 라이따이한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려 하고 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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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3:04
ㆍ추천: 0  ㆍ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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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mcafe.cafe24.com/cafe/?namboard.490.22
“ [시리즈-12] 동포의 이름으로 부른 '사랑노래' ”
동포의 이름으로 부른 '사랑노래'
내이름은 라이따이한/한국교회 이름으로 '신앙' 전할 때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목사로 활동할 수 있는 한국 사람 김영관목사와 정주섭씨다.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 문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김영관목사다. 호치민 시내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서.
호치민에서 휴메인직업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관목사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한국인이다. 그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1천4백명의 라이따이한을 확인하고 전산처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신문과 전화번호부 등에 광고를 내서 라이따이한들이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 등록하도록 했다. 이 학교에 등록한 라이따이한들에게는 영어와 한국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고 생활비 일부를 지원했기 때문에 베트남에 사는 대부분의 라이따이한 숫자가 파악됐을 것이라는 것이 김 목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본보는 호치민을 떠나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동부 해안선을 따라 나쨩에서 퀴년까지 다니며 라이따이한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은 김 목사의 '리스트'에 파악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 목사도 "호치민의 라이따이한은 거의 모두가 파악됐을 것으로 보지만 중부지역에는 파악되지 않은 라이따이한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관목사는 1990년대 초 베트남에서 활동하면서 라이따이한들을 만났으며,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그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라이따이한을 위한 직업기술학교에 대한 비전을 가졌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베트남복지선교회 등의 도움으로 설립된 휴메인직업기술학교는 라이따이한들에게 영어와 한국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휴메인직업기술학교는 호치민시 인민위원회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베트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호치민 시내에 교사도 마련할 수 있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휴메인직업기술학교는 라이따이한이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기도 했다.

라이따이한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93년. 여섯명의 라이따이한으로 구성된 모국방문단은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것으로 그동안 응어리진 한을 풀 수 있었다. '내이름은 라이따이恨'에 소개됐던 쨘다이송도 1994년에 모국방문단에 포함돼 아버지의 나라를 찾았고 거기서 송주일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을 도와온 휴메인직업기술학교에는 지금 라이따이한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졸업을 하고 이곳을 떠나 베트남의 기성세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라이따이한 대신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직업기술을 교육받는, 베트남의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따이한들에게 '빠빠정'으로 불리는 정주섭씨(사진 오른쪽)가 자신이 돌보았던 쨘다이송씨의 사업체를 찾았다.
휴메인직업기술학교가 문을 열기 전에는 정주섭씨가 설립한 직업기술학교가 라이따이한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 베트남에 들어간 정주섭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인 기술자들이 많이 모여살았던 호치민 판반하이에서 라이따이한들을 돕기 시작했다. 한국의 한 복지단체의 도움으로 시작된 직업기술학교에는 영어와 한국어 타자를 가르쳤고 기숙사도 운영해 소문을 들은 라이따이한들이 몰려들었다.

본보가 입수한 라이따이한들의 이력서도 정주섭씨와 정 씨를 도왔던 강희조씨가 작성했던 것. 정주섭 강희조씨는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라이따이한을 취업시키기 위해 작성했던 것이며, 이 이력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난 라이따이한들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라이따이한으로 라이따이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김상일씨
라이따이한들은 정주섭씨를 '빠빠정'으로 부르며 따랐고 정주섭씨는 자신을 의지하는 라이따이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로 성장한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은 여전히 그를 '빠빠정'으로 부르며 따른다.

라이따이한 김상일씨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지금도 라이따이한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라이따이한이 직면한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김상일씨는 자신이 파악한 라이따이한의 명단이 6백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한국정부와 일부 한국인에 대해 피해의식이 강한 그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벗지 못하는 라이따이한들이 많으며, 그들을 한국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하는 이들에게는 한국에 가서 노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하지만 상일씨의 주장은 한국과 베트남의 여건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상일씨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호치민 김지영총영사는 "고용허가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은 한국 기업은 물론 베트남 정부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김영관목사와 정주섭씨 그리고 라이따이한 김상일씨 외에 라이따이한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한국 교회가 파송한 베트남 사역자들의 모임인'VDF'회원들도 있다.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사역자들도 라이따이한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지난 1월 열린 VDF신년하례회 모습.
'내이름은 라이따이恨'이 소개한 김수산씨도 VDF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 사역자의 관심으로 한국에 와서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사례다.

동포의 이름으로 라이따이한을 도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땀으로 오늘의 따이한들은 한(恨)을 버릴 수 있었다. 이제는 크리스찬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때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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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3:02
ㆍ추천: 0  ㆍ조회: 180    
IP: 220.xxx.155
http://namcafe.cafe24.com/cafe/?namboard.489.22
“ [시리즈-11] 베트남에서 보내는 '아버님 전상서' ”
"더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
내이름은 라이따이한/ 베트남에서 보내는 '아버님 전상서'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아버지. 당신은 지금 살아계시다면 연세가 매우 높으시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보고싶어 하는 것은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며 보낸 그 인고의 시간들을 하소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한번도 찾지 않으셨느냐고 비난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동안 저와 당신의 아내인 제 어머니를 모른척 했으니 이제는 좀 그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우기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아버지쟎아요. 그래서 보고싶을 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아버지. 저도 이제 30대 후반의 가장입니다. 철부지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었습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보고싶은 건 매한가집니다만, 이제 원망 따윈 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는 아내와 자녀를 두었으며, 풍족하진 않아도 예전처럼 그렇게 배를 곯고 살진 않습니다.

아버지. 이젠 아마도 당신을 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져 포기해햐 할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라이따이한들은 한국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베트남의 기성세대가 되고 있으며, 베트남 경제의 주역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슬퍼하지 않으며, 더이상 아버지를 찾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사는 그런 날을 꿈꿀 뿐입니다. 안녕히계십시오.

베트남에서 만난 많은 수의 라이따이한들을 인터뷰하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낸 '아버님 전상서'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된 라이따이한들에게 아버지는 '만나야할' 대상에서 그저 그립고 '만나면 좋을'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몇몇 라이따이한은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한국정부 나빠요"라거나 "아버지 나빠요"라며 원망을 쏟아놓는 이들도 없진 않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앞을 가려 더이상의 인터뷰가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본보가 베트남에서 입수한 라이따이한 5백23명의 이력서.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평상심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혹은 남편)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크고 넓은 운동장과 같은 기억의 마당에 자리잡은 벤치 한개쯤이다. 운동장에서는 공도 차야하고 달리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신나게 놀아야 한다.

본보는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 5백32명의 이력서를 찾아내 국내 언론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이력서들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의 숫자를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제시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1990년대 초반에 작성되어 10여년 만에 빛을 보게 된 라이따이한들의 이력서는 아버지의 나라에 보내는 '아버님 전상서'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1990년대 초반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들을 돌보아온 정주섭씨의 '휴게실' 벽에 붙은 라이따이한들의 활동모습.
본보가 공개한 이 이력서들은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외교관계를 맺기 전이던 1980년대 말에 베트남에 들어가 지금도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는 정주섭씨(70세ㆍ호치민거주)와 정씨를 도운 강희조씨(40세ㆍ호치민거주)가 함께 작성한 것들이다. 5백32명 각각의 이력서에는 라이따이한 본인의 사진과 함께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진과 자료 등이 함께 들어 있거나 아버지에 대해 남아있던 단편적인 기억에 대한 메모가 있는 경우도 있다.

   
베트남 호치민시의 판반하이 거리 모습. 이 곳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도 한국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지금도 한인 2세, 3세들을 볼 수 있다.
이번에 발견된 5백32명의 이력서에는 본인 외에 형제 자매들에 대한 기록도 있어 전체 라이따이한의 숫자를 가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력서를 작성할 당시 5백32명의 라이따이한들은 거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으나 지금은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됐다.

그동안 보관해온 5백32명의 이력서를 본보에 제공한 강희조씨는 "당시 극빈자 생활을 하던 라이따이한들을 한국 기업에 취업시키기 위해 한사람씩 인터뷰를 하면서 작성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라이따이한의 숫자를 가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라이따이한의 숫자는 많게는 수만 명에서 적게는 3천 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지만 근거자료가 제시된 적은 없었다.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들을 도와온 이들도 역시 "1천4백명의 데이타가 있다"거나 혹은 "6백명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사생활이 노출되는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이력서를 작성하고 보관해온 정주섭 강희조 두 사람은 호치민 판반하이에 살고 있다. 호치민 탄손나트(Tan Son Nhat)공항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의 판반하이는 베트남전쟁 당시에도 한국인 기술자들이 대거 몰려 살았던 동네. 지금도 그 거리에는 여전히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으며, 한국인 2세와 3세들도 볼 수 있다.

5백32명 라이따이한의 이력서는 베트남에서 작성되어 10여년 만에 기독공보의 손을 통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왔다. 5백32명 라이따이한의 이력서는 베트남내 라이따이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지만 사실 이 이력서들은 아버님전상서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국인의 피를 받은 베트남사람으로 한국기업에 취업해 안정된 삶을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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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58
ㆍ추천: 0  ㆍ조회: 315    
IP: 220.xxx.155
http://namcafe.cafe24.com/cafe/?namboard.488.22
“ [시리즈-10] 베트남 아내에게 쓰는 편지 ”
베트남의 아내에게 쓰는 편지
내이름은 라이따이한/ "딸의 한국행을 서둘러주시오"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베트남에 아내와 딸을 남기고 온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도 입수됐다. 서울에서 암과 투병하는 한 아버지는 베트남의 딸을 초청하기 위해 수속을 밟으며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결국 딸을 초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딸은 한국으로 오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 수금(秀琴:남편이 아내에게 지어준 한글이름)에게

오늘 베트남제일은행으로 2백달러를 송금했소. 최근에 나에게는 암이 재발해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오. 하지만 나는 내 병에 대해서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오. 지금은 서울에서 사업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듯하오.

몇 일 전에는 딸 미영(가명)이를 서울로 데려와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엘 다녀왔소. 미영이가 한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우편으로 서류를 보낼테니 준비해주시오. 내 생각에 미영이는 사이공(호치민)에서 대학을 마친 뒤에 서울을 오는 것이 좋을 듯하오. 당신도 알다시피 한국의 내 아내에게 미영이의 이야기를 했고 아내는 베트남의 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오. 하루속히 미영이가 서울에 와서 함께 살 수 있기를 기대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영이가 영어 시험에 합격해야 하오.

조만간 다시 전화하리다. 난 결코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오, 당신은 내가 베트남에 있을 때 너무나 잘해주었잖소. 늘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소.

추신 : 사랑하는 딸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가능한한 빠른 시간 안에 꼭 서울에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랑을 보내며. 1995년 6월14일.



※ 이 편지는 영어로 작성됐던 것이며 개인신분을 노출할 수 없어 가명으로 처리했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2월 21일     


 
이름아이콘 마틴리
2010-08-11 15:36
이남원 전우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 늦었더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세우고, 준비를 하여야, 5000년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가 살아날것 같읍니다.베트남전은 우리한국의 경제기반을닦는데 그 초석이되었던것 부인할수없는 역사이기도 하구요...,이전우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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