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적지여행의 체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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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세월이 훌쩍 흘러
아련한 그리움이 있는 땅
내 마음의 그리움을 찾아 떠난다
설레임에 가슴벅찬 베트남 전적지여행
       
 
라이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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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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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4] 편지 간직한채 살아가는 초로의 아내 ”
편지 간직한채 살아가는 초로의 아내...
르포' 기독공보가 찾은 라이따이한 2. - 투이호아에서 퀴년까지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나쨩을 떠나 택시를 대절해 타고 북쪽 퀴년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얼마를 달렸을까 큰길에서 택시는 주유소를 만나 배를 채운다. 우리 일행이 화장실을 보기 위해 나
   
타오씨
오자 삼각형의 베트남 전통모자 '논'을 쓴 여성이 무언가를 팔겠다는 기세로 다가온다. 주유소에서 복권(베쏘)을 팔아 생활하는 이 여인도 타오라는 이름의 라이따이한이다. "사진과 주소가 모두 집에 있다"는 타오씨를 뒤로 하고 주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나야할 라이따이한이 많았으므로.

나쨩에서 투이호아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해야 한다. 새벽에 쌀국수를 한그릇씩 먹고 출발한 택시는 점심이 다 되어서야 투이호아에 닿을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유류기지가 있었던 투이호아항 배후에는 한국군인들이 주둔했었으며, '타 알람'과 '호아 히입' 등 마을에는 모두 6명의 라이따이한이 산다는 것이 라이따이한 가이드의 설명이다.

투이호아에는 아버지가 다른 베트남 여동생들을 둔 라이따이한의 어머니가 사는 동네다. 한국군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푸 람'에서 한국인과 사이에서 2남1녀를 낳은 장 디 유(66세)씨는 베트남이 통일된 뒤 적군(한국군)의 아이를 낳았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야했다. 아들 은 한국에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만나는 것을 거절당했다.

   
락티김광씨
투이호아를 출발해 북쪽으로 길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닿은 송카우에서는 탁 티 김광(72년생)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물론 어머니 탁 티 유(56세)씨도 남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대위, 엠피(MPㆍ민정경찰로 추정됨)"라고만 알고 있었다. 딸은 "통일이후 어머니는 공산당 정부가 두려워 사진과 자료를 모두 불태웠지만 만약에 아버지를 만나면 '라이따이한'이라고 미움을 받고 자랐고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초로의 아내는 "돌아가면 편지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진한장 찍고 떠난 남편이 보고싶다"고 눈물지었다.

다시 송카우 북쪽 쑨락 마을에 도착했다. 1969년생 응인 티 흐엉씨와 어머니 응인 마이씨(62세) 두 모녀는 남편과 아버지의 이름(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또 같은 마을에 사는 1969년생 원 티나씨는 4남매가 모두 라이따이한이며, 1968년생 당 반 렁씨의 어머니는 같은 마을의 응인 마이씨와 함께 마을에서 음료수를 팔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자리에 모인이들은 어머니와 아들 딸 할 것 없이 "아버지가 보고싶다"고 입을 모았다.

   
응인티흐엉씨가족
쑨락의 또다른 마을에서 만난 반 호앙씨(1972년생)는 아버지(신△△)에 대한 기억을 사진과 자료로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1중대' '벙커' '맹호부대 중위' 등 한국말 몇 개로도 기억하고 있었다. 호앙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살았던 '할머니집' 옆에 살면서 "바로 저 집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았던 집"이라고 가리켰다.

   
렁티메이융씨
1950년생으로 6년간 남편과 살면서 두 아들을 낳은 렁 티 메이 융씨는 남편의 이름과 생년월일은 물론 두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1947년생 람 티 킴풍씨 역시 남편의 이름과 나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퀴년의 △△식당에서 함께 함께 일하면서 68년생 69년생 두 딸과 73년생 아들을 얻었다. 그녀는 남편이 지난 2005년 3월에 호치민으로 찾아와 가족들과 만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당 티 홍안씨는 1971년생으로 베트남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아버지의 이름(최△)은 기억하지만 나이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1970년에 '맹호부대 이대위'로 기억되는 아버지를 만나 10개월간 살면서 홍안씨를 낳았다. 살아있다면 66세쯤 되었을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수진'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어줬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지난 1993년 단 한 차례 답장을 보내왔었다. 아버지는 수진씨가 결혼하고 손자(My Grand Son)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아내에게 "당신을 실망시키고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구려,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가능한만큼 빨리 사탄과 같은 나를 잊기 바라오"라고 썼다. 홍안씨는 10년이 훨씬 넘은 이 편지를 여전히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투이호아항 전경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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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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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3]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발굴 르포' 기독공보가 찾은 라이따이한 1. - 나쨩을 중심으로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아침의 호치민은 활기에 넘친다. 아침 6시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탄손나트 공항으로 가는 새벽길은 언제나 그랬듯이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몇 대의 자동차가 얽히고 설키면서도 큰그물에 잔고기 빠져나가듯이, 유유히 흘러간다. 호치민을 떠난 비행기는 50분 만에 캄란공항에 안착했고, 라이따이한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렇게 캄란에서 시작해 나쨩을 거쳐 투이호와 송까우 쑨락 그리고 퀴년까지 2박3일 동안 이어졌다.

   
길성호씨.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캄란에서도 시내 큰길가에 자리한 미용실. 말이 미용실이지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에나 있을법한, 이끼가 끼이고 무너져내린 건물 안쪽에 신기하게도 미용실이 있었다. 미용실의 주인은 길성호씨다. 1968년생이니까 베트남 나이로 올해 서른아홉이 됐다.

미용실 칸막이를 뒤로 하고 액자에 담긴 사진과 오토바이 핼멧 그리고 촛불이 놓여 있는 탁자가 있다. 한눈에도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젯상쯤으로 여겨졌다. 아니나다를까 지난해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성호씨의 형 성길씨(1967년생)를 기리는 것이다. 형제의 아버지는 나쨩에서 '김하식당'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그곳 식당의 종업원이었다.

성호씨는 형 성길씨가 아버지를 따라 1970년 한국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전했다. '그런 아버지도 있었구나' 기대에 찬 눈으로 듣고 있자니 "아버지는 형을 고아원에 넣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형 성길씨는 1993년에 동생 성호씨와 함께 살기 위해 베트남으로 왔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

   
방트랑씨 가족.
아버지가 떠난 뒤에 어머니는 식당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공산정부에 빼앗겼고 그 뒤로 지금까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성호씨는 "조금은 슬프죠, 지금은 괜찮아요. 아버지를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캄란에서는 많은 수의 라이따이한을 만날 수 있었다.

1971년 9월5일생 방 티 투 트랑씨는 1942년 10월22일 충북태생으로 캄란공항에서 운전기사를 했던 아버지 방△△씨와 1951년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집에 그녀는 없고 그녀의 남편만 있다. 아뿔사 그녀는 생활고에 못이겨 몸을 판다고 했다. 기자를 이곳까지 안내한 가이드(그도 역시 라이따이한이다)는 통역도 마다한채 남편과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가이드는 한국 정부는 너무 나쁘다, 화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자동차로 5분 거리에 그녀의 동생 방 티 투 타이씨가 산다. 동생 타이씨는 언니 트랑씨보다 사는 형편이 조금 나은 듯하다. 타이씨의 남편은 공장에서 일을 해 월급을 받아오고 타이씨도 집에서 애기를 돌보며 부수입을 올린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트랑 타이 자매 외에도 막내 여동생이 한 사람 더 있다. 타이씨는 아버지와 관련된 많은 사진과 자료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여권 번호(Passport No)는 1로 시작해 7로 끝나는 여섯자리 숫자다.

캄란에서 만난 또다른 라이따이한 응엔 만 렁(1970년생ㆍ남)씨. 어머니 응엔 티 라이는 1950년생이며 당시 나쨩의 큰길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이름과 아직 살아있다면 70세정도 됐을 것이란 것 외에 이렇다할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1974년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렁씨의 외할머니가 반대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다지 오래 함께 살지 못했다.

   
응엔만렁씨 가족.
라이따이한의 아버지의 대부분은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거부하거나 한국의 가정이 파탄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1953년생 팜 테이 호아씨는 1971년 헤어졌던 남편을 2002년에 베트남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1970년생 딸 이순희씨 - 그러니까 호아씨는 열일곱 나이에 딸을 낳은 것이다 - 와 함께 만난 남편은 불과 반나절만에 딸에게 2백달러를 주고 가버렸다고 했다. "30년을 기다렸는데… 반나절만에 돌아가 버렸어요"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였고, 어머니의 눈물은 딸도 적셨다. 몇 마디 묻기도 전에 두 모녀는 눈시울부터 적신다. 베트남에서 두 여자를 울렸다.

   
팜테이호아씨 가족.
전쟁. 전쟁은 사람의 본성을 흔드는 모양이다. 호아씨는 나쨩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따라 식당에서 자곤 했는데, 어느날 잠긴 문을 따고 들어와 중학교 3학년의 꽃다운 여학생을 범한 한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희씨의 아버지다. "2002년에 만난 아버지는 그저 밥만 먹었을 뿐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도 물어보지 않고 가버렸어요" 그녀가 또 운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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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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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2] 아버지 나라에서의 척박한 삶 ”
아버지 나라에서의 척박한 삶
국내 거주 라이따이한 '김한순씨와 그 가족'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와서 '김한순'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사실은 라이따이한 김한순씨(35ㆍ여)의 삶이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곤궁한, 한국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국내서 어렵게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 김한순씨 가족.
서울 왕십리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가만히 누워있는 아들 김성훈(11살)과 함께 맞아주었다. 성훈이는 그녀가 베트남에서 남편 윈반홍씨와의 사이에서 낳았으며, 근력무기력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지체장애아동이다. 2001년 한국에 들어온 그들 부부는 한국에서 아들 하나를 더 얻었고, 두살배기 성민이는 구청에서 보내주는 어린이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김한순씨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 이름과 한국 국적을 얻게 된 것은 동생 김한호(34세)씨가 1999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와 일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김한순씨 형제는 모두 4남매로 한호씨 밑으로 일호(32세) 기호(31세)씨가 모두 서울에서 베트남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베트남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1년 호치민. 수많은 한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왔던 남편을 만난 한순씨의 어머니 래비한(63세)씨는 당시 베트남의 수많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편과 사랑했고 자녀를 두며 가정을 꾸렸다. 1975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기술자였던 한순씨의 아버지도 한국으로 떠났고 그들 가족은 그렇게 버려졌다. 대부분의 라이따이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라이따이한의 이야기다.

베트남에서 그녀의 가족은 한국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라이따이한으로 어려운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2세는 물론 2세를 부양하던 양부모까지 모두 미국으로 데려간 것과 비교하면 따이한, 대한민국은 참으로 어이없는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자기 국민들이 남의 나라에서 뿌려놓은 2세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는 커녕 그런 사실조차 인정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베트남으로부터 냉대받는 어이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던 1999년 어느날 한순씨의 동생 한호씨가 아버지를 찾으러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변호사에게 비용을 주고 베트남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간 한호씨는 아버지를 찾았으나 소송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서야 비로소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국적을 얻어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한호씨를 뒤이어 한호씨의 누나 한순씨와 동생들이 모두 들어와 한호씨와 같은 단계를 밟아 국적을 얻었다.

한순씨 부부는 새문안교회(이수영목사)에 출석하면서 이런저런 모양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한순씨 집을 찾아간 날에 남편은 집에 있었다.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겨울이 되면서 일감이 없어 하릴없이 놀고만 있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사정은 모두가 왕십리 인근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순씨 부부는 장애인 아들의 병원비와 끼니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베트남에 현지인 교회를 건축해온 베트남선교협회(사무총장뎳박창환)가 최근 라이따이한 2세들의 교육비를 지원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마련하는 등 한국 교회가 라이따이한과 그 2세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명과 평화 그리고 선교의 차원에서 라이따이한과 그 2세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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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진사
작성일 2007-04-04 (수) 12:14
ㆍ추천: 0  ㆍ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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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1] 또 다른 이웃 라이따이한 ”
"또 다른 이웃 라이따이한"
내 이름은 라이따이限<1> 연재를 시작하며

 

박성흠 기자 jobin@kidokongbo.com     

 

파괴와 무질서는 전쟁이 가져오는 현상의 단순화된 추상적ㆍ관념적 표현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배고픔은 전쟁으로 겪게 되는 수많은 고통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 전에 '한국전쟁' 혹은 '6ㆍ25'로 명명되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연상되는 이같은 표현의 절실함은 세대를 따라 그 강도를 다르게 느낀다.

   
베트남에서 잊혀지는 라이따이한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베트남전 당시의 모습.
베트남 한인2세를 지칭하는 라이따이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우리 국민들에 의해 생산된 베트남 한인2세를 일컫는 베트남 말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미군 남성과 우리나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튀기'라는 말로 비하해서 부르던 때가 있었듯이, 라이따이한은 사실 베트남에서 한인2세를 비하해 부르기도 말이기도 하다.

전쟁과 라이따이한. 두 단어가 인과관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라이따이한'은 파괴와 무질서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배고픔과 같이 전쟁이 연상시키는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베트남전쟁이라는, 특별히 우리에게는 '남의 전쟁'에 총칼을 들고 참여해 피흘려 돈을 벌어들인 가슴아픈 역사적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한인2세들은 전쟁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고통은 다른 베트남 사람과 똑같이 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고통 중에 보내야 했다.

△생명을 살리는 신문 △평화를 이루는 신문 △선교를 이끄는 신문을 사시로 내건 본보는 창간60주년을 맞아 베트남 한인2세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그들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한구 교회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내이름은 라이따이한(恨)'을 기획한다. 특별히 지금 우리나라에는 소수의 라이따이한과 그 2세들이 들어와 매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몇 안되는 라이따이한과 그 2세들에게는 경제적인 지원과 귀화시험에 대한 준비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절실하다. 베트남에도 어려운 처지의 라이따이한들이 한국교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에서 그들에게로 관심을 확대하는 일도 필요하다.

취재과정에 만난 리모씨(52세ㆍ여). 베트남 전쟁중에 만나 사랑한 한국인 기술자였던 남편을 따라 1975년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른 한국사람과 혼인해 살면서 '베트남어 한국어 통역자원봉사자'로 풍족하게 산다는 그녀는 기자를 붙잡고 눈시울을 적셨다. "교회에 갔기 때문에 사람들과 정을 나눌 수 있었지만 나를 멸시하는 눈 때문에 지금은 더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집 바로 옆에 교회가 있는데 매주일 11시가 되면 '아, 예배할 시간이구나'하고 생각만 하지요, 여기(그녀는 가슴을 가리켰다)에 하나님이 계시면 되지 않나…"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동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우리 말을 이었갔다. "한국에는 얼마 안되는 라이따이한들이 월세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어요, 교회가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어요".

 

(출처:한국기독공보 / www.kidokongbo.com )     입력 : 2006년 0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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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01-30 (화)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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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따이한의 대부 "파파정" ”

라이따이한 아버지 "파파 정"(한국명:정주섭씨)

호치민의 코리아타운 '팜반하이' 거리는 호치민 탄산누트 공항에서 택시로 5분거리에 있다.
사이공 4지구 '푸미홍'에 신도시가 만들어 지면서 그곳에 새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면서
한국의 주재원이나 부유층이 많이 옮겨갔지만, 한국인들은 '팜반하이'에 아직도 많이 산다. 




대형 재래시장이 길끝쪽에 위치하고 있어 주거환경이 편리한 이 거리에, 10여년전 정주섭씨가 단신으로 이곳에 와서 다목적 휴게실을 운영하면서 라이따이한을 돌보면서 정착하였다. 차츰 한국사람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면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최진사가 2007년 1월1일 새해아침 정주섭씨를 만나러 갔다.




이남원 전우의 안내로 택시를 타고 팜반하이로 갔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우선 타국에 와서 한글 간판을 보니 반가움이 앞선다.



한호성 전우를 그곳에서 만나니 얼마나 반가웁겠는가? 한호성 전우는 사이공에서 30km쯤 북쪽 빈증이라는 곳에 집을 지었으나 아들이 이곳 한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곳에서 소일 하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자신은 늙은 맹호지만 아들이 사회에 나가서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 하는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주섭씨가 운영하는 다목적 휴계실식당은 음식값이 저렴하고 고향의 맛이 있어서 이곳 많은 한국사람들이 찾아와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음식값이 25.000동 35000동 한국돈 2천원 3천원이면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 베낭여행객들도 한국음식이 생각나면 이곳을 찾아와 한국인들도 만나고 고향의 음식맛을 즐기고,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는 흐뭇한 시간을 가진다.




처음 뵙는 정주섭 씨(72세,팜반하이 거주)는 연세에 비하여 건강한 모습이었고, 인자한 느낌을 주었다. 정주섭씨는 새해정초라며 같이 자리한 전우들에게 귀한 술을 한잔씩 따라 주시고, 떡꾹을 한접시씩 돌리며, 우리들에게 라이따이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라이'(Lai)의 뜻은 '튀기'를 의미한다.

라이따이한은 한국인의 피가 섞인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를 둔 한국인2세를 말한다.
라이따이한이 생기게 된 배경 바로 그 옆에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라이따이한 그러면, 흔히들 월남전 파월용사들에 의해 그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낳아지고, 버려진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베트남엔 많아야 2,000명 정도의 라이따이한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라이따이한 아버지는 파월근로자 및 군속으로써 파견되었던 한국의 일반 민간인 들이었다. 그 중에 100명에 1명정도 국군장병의 자녀이고 대부분 파월기술자 민간인들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국인 아버지의 아들 딸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한국인 아버지의 뿌리를 잊고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주섭씨는 라이따이한이 찾아오면 사연을 확인하고 조건없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준단다.
라이따이한 들은 정주섭 씨를 "파파 정"은 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아빠역할을 하는 대부로 통한다.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2세들은 정주섭씨가 임대한 휴게실이 붙은 4층짜리 가옥에서 취직하거나 독립하기까지 돌봐준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따이한의 신분으로 취직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워 여자 라이따이한들은 보통 잔심부름을 하거나 카운터를 볼수 있는 한국인 가정이나 가라오케에 취직하기를 바라고, 남자들은 보통 한달에 약 60달러 정도의 비교적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발, 가방공장등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물론 ‘파파정’이 동분서주 그들의 취직 자리를 알아보지만 2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




정주섭씨는 이들을 위해 친분이 있는 한국인들을 찾아가 호소를 하고 지원요청을 했다. 그리고 많은 도움도 받앗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순수한 정주섭씨를 매도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좌절하여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파파! 힘내요" 격려 때문에 다시 기분을 돌렸다고 한다.



파파 정 그는 라이따이한들이 어떤 과정에 의해 잉태했고 또 어떤 아픔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월남전 당시 현지에서 분명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이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에서 한국일보 지국을 5년간 운영한 것이 오늘이 있게한 인연이었단다.




2층 휴게실 벽면을 가득 메우도록 붙어있는 지난 사진들을 보니, 베트남에 다시와서 라이따이한을 돌보고 그들의 대부 노릇을 하며 취직도 시키고 결혼도 시키며 참 많을 일을 한 세월이 보인다. 한국의 친아버지도 챙기지 않는 자식들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 가능한일이 아니다. 정작 정주섭씨 자신은 한국에 있는 마누라와 아들 딸에게 가장의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한국 본가에 가면 환영받지 못했단다. 최근에 와서야 아들이 좋은평을 받는 아버지를 이해하게되고, 어머니를 설득시켜 지금은 부인이 베트남에 와서 다목적 휴게실의 안주인으로서 같이 봉사하고 계신다. 이제는 오히려 성공한 라이따이한들이 용돈도 준다고 자랑한다.



정주섭씨는 우리에게 A4지 5장 분량의 유인물을 건네 주셨다. 라이따이한 한국인 2세 "쨩 다이녁"이라는 젊은이가 시집을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단다. 한국이름은 "김상일"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백마28연대 CIA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데, "쨩 다이녁"은 그의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냉대를 받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쨩 다이녁"은 아픈 심정을 詩로 썼다고 합니다. 내용은 보지 않았지만 가슴 아리는 사연일겁니다.

▼정주섭씨가 전해준 유인물 별첨 →클릭!!!



"파월군인들은 전투하느라 정신없었고, 관계를 맺더라도 가끔 월남의 사창가에 들렀던 정도였습니다...물론 라이따이한의 아버지가 군인들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수 없습니다.

라이따이한은 대부분 파월근로자 및 군속의 자재들이지만, 그중에 파월군인의 아들인 "쨩 다이녁"이 외치면 베트남에서도 많은 반향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과 호주는 국가적 차원에서 자국의 2세들을 모두 데려 갔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무관심 입니다. 베트남과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손을 써야할 부분입니다."
"라이따이한은 우리 대한민국의 아들,딸입니다." 정주섭씨가 힘주어 말했다.

정주섭 (Chung Ju Sup)
주소: 54 Tan Son Hoa Street 2 Ward Tan Bin  Dist., HCMC Vietnam
전화: (84-8) 539-9211 팩스: (84-8) 296-3088
메일: dainhattravel@dain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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